넷 엔트 슬롯 조선미술동맹 ()

회화
단체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미술단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미술단체.
변천

1946년 11월 10일 넷 엔트 슬롯문화단체총연맹 산하의 두 미술조직인 넷 엔트 슬롯미술가동맹과 넷 엔트 슬롯조형예술동맹, 그리고 넷 엔트 슬롯미술가협회에서 탈퇴한 넷 엔트 슬롯조각가협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단체이다. 넷 엔트 슬롯미술가동맹과 넷 엔트 슬롯조형예술동맹은 1946년 8월 11일 미군정청 문교부의 미술과목을 수의과목(隨意科目: 선택 과목)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대책을 함께 논의하며 공동투쟁을 결의하였다. 두 단체는 넷 엔트 슬롯조각가협회까지 포함하여 8월 20일부터 27일까지 해방기념 문화대전람회 미술전을 합동으로 개최하였고 곧이어 11월 10일 통합을 선언하며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을 발족하였다. 위원장으로 윤희순, 부위원장으로 이인성과 오지호, 서기국에 박문원과 김만형이 선출되었다.

1947년에 들어서 시작된 미군정청의 좌익예술인 검거개시 이후 좌익미술운동단체들의 활동이 비합법화하게 되자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에 속했던 미술가들이 대다수 탈퇴하였다. 탈퇴한 작가들은 넷 엔트 슬롯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또 위원장이었던 윤희순의 죽음과 김주경, 김정수 등 월북작가들이 늘어감에 따라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은 유명무실해갔다. 1947년 11월 미군정청 문교부가 개최한 넷 엔트 슬롯종합미술전람회에 출품거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끝으로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은 공식적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1948년 남한만의 단정 수립과 동시에 조직이 해소되었다.

활동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은 “미술의 인민적 계몽”을 명시한 강령에 따라 가두전ㆍ이동순회전ㆍ전시회 개최 및 가두장식ㆍ벽보ㆍ만화ㆍ전단 제작과 같은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러한 대표적인 활동으로 1947년 5월 이동미술전대(移動美術展隊)를 조직하고, 경남 마산 전시를 시작으로, 부산ㆍ진주ㆍ청주 등을 거쳐 대전 후생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또 미술의 대중화 맥락에서 전재동포구제모금을 위한 미술즉매전(1946. 12. 25∼12. 31), 3·1절 기념전(1947. 3. 1∼3. 7) 등을 열기도 하였다. 회원전으로 1946년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제1회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전을 개최한 데 이어, 다음 해인 6월 5일까지 미소공위 속개를 축하하는 의미로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회원전을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넷 엔트 슬롯미술동맹은 해방공간에서 진보적 미술이념을 내세운 단체들이 결성한 통합단체였다. 좌익 미술단체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넷 엔트 슬롯미술가동맹과 중견작가들의 집합체로서 명성을 지닌 넷 엔트 슬롯조형예술동맹이 통합단체를 결성함으로서 미술운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높인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2006)
『한국현대미술운동사』(최열, 돌베개, 1991)
「해방공간의 미술연표」(최열, 『계간미술』, 1987. 겨울)
• 항목 내용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