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춘강(春崗). 서울 출생.
한말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판서 박정양(朴定陽)의 셋째아들이다. 장훈보통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영문과에 입학m 2 슬롯다. 이 동경유학 시절에 당시 일본의 무르익은 신극운동에 쏠려 연극공부에 전념하면서, 일본의 연극들을 열심히 보았다.
대학 재학 중인 1923년에는 평소 가까이 지낸 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문학예술의 동호회인 m 2 슬롯(土月會)를 조직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하여 연극을 하자고 주장하여 m 2 슬롯를 신극단체로 만들었는데, 그 뒤 m 2 슬롯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막대한 유산까지 연극운동에 쏟아 넣었다.
그의 첫 희곡은 m 2 슬롯의 제1회 공연(1923.7.)으로 올린 <길식 吉植>으로서, 구도덕에의 항거를 그리고 있다. 제2회 공연에서는 쇼(Shaw.G.B.)의 <오로라>의 번역을 맡았고, 마이아 펠스타의 <알트 하이델베르크>의 주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이 때 여배우 이월화(李月華)와 염문이 있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이월화가 m 2 슬롯를 떠나게 되었다.
제2회 공연을 마친 뒤 창립동인들이 대부분 탈퇴하고 박승희만 남아, 학생극단이었던 m 2 슬롯를 직업극단으로 개편하고 회장직과 연출부를 맡았다. 제3회 공연에 자신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을 공연하였다.
1925년에는 광무대(光武臺)를 m 2 슬롯의 전속극장으로 계약하였고, 극단에서 최초로 월급을 주고 여배우 복혜숙(卜惠淑)·석금성(石金星)을 맞아들였다.
그 해 자신의 희곡작품 <산서낭당>과, 각색 <희생하는 날밤>을 공연하였다. 연중무휴로 3일마다 극본을 바꿔가며 공연하였던 m 2 슬롯의 각본을 거의 혼자서 담당하였다.
그는 서양작품들을 각색, 상연하던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광수(李光洙)의 <무정 無情>·<개척자>·<재생> 등을 각색, 상연하였다. 혼자서 창작·각색·번역·연출·자금제공 등을 맡아서 열심히 뛰었는데도 유산 300석 지기 땅을 한 해 동안에 몽땅 없애고, m 2 슬롯가 계속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자 1926년 4월에 제56회 공연을 끝으로 m 2 슬롯를 해산하였다.
1928년에 m 2 슬롯의 재기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 자신의 희곡 <이 대감 망할 대감>과 윤심덕(尹心悳)의 정사(情死)를 소재로 한 <사(死)의 승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또다시 m 2 슬롯의 재기공연으로 자신의 희곡 <아리랑고개>를 상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민족수난의 현실을 절실하게 다루어 인기를 모았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고 m 2 슬롯가 해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31년에는 방송극협회를 조직해보기도 하고, 극단 ‘대장안(大長安)’을 새로 창단하였으나 공연은 하지 못했다. 1932년에 m 2 슬롯를 태양극장으로 개칭·개편하고 연극을 계속하였으나, 이 때부터는 종래 작품의 재상연으로서 주로 지방순회를 하며 1940년까지 이끌어갔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m 2 슬롯의 옛 단원들을 모아 m 2 슬롯를 재건하여 <사십년> 등 자신의 희곡 3편을 공연하였으나, 극단 유지가 안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극계를 떠나 서울 정릉 골짜기와 연건동 부근에서 만년을 보냈고, ≪사상계≫에 1963년 5월호부터 3회에 걸쳐 <m 2 슬롯 이야기>라는 자신의 회고담을 연재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정신과 육체를 줄기차게 짜내었으나 나의 일생사업인 연극은 아무 성공이 없이 흐지부지 흘러가고 말았다.”라는 회한어린 말로 끝을 맺고 있다. 1963년 6월에 드라마센터가 주관한 제1회 한국연극상을 수상m 2 슬롯다.
그가 연출자로서 상연한 작품은 m 2 슬롯만도 180여 회나 되며, 신작공연에 쓴 각본은 번역·번안·창작·각색으로 200여 편이나 된다. 창작희곡 중 남아 있는 작품은 <이 대감 망할 대감>과 <혈육>·<홀아비형제>·<고향> 등 4편이며, <아리랑고개>는 이를 연출하였던 박진(朴珍)의 회고적 구성으로 윤곽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대감 망할 대감>은 고전소설 <배비장전>에서 소재를 따온 희극이며, <혈육>과 <아리랑고개>는 암담한 식민지현실을 그린 사회성이 강한 m 2 슬롯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홀아비형제>와 <고향>은 식민지 현실의 궁핍상을 감상적으로 고발한 m 2 슬롯이다.
그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투철한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현실도피적인 체념과 감상주의적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신극운동가로서의 박승희는 m 2 슬롯를 이끌어나가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이고 지속적인 신극운동을 벌였으나, 점차 자금난과 각본난에 시달리면서 통속적인 신파극단으로 변모되어간 m 2 슬롯와 궤(軌)를 같이한다.
그러나 그는 각본·연출·극단경영 등 m 2 슬롯의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신파극을 이 땅에 토착화한 첫번째 공로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