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777는 고려 후기에 북계분대어사·감찰어사·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몽골과의 화의 교섭 등에 활약한 인물이다. 몽골의 첫 번째 침입 당시 슬롯 777는 몽골 원수 살리타이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폈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위해 몽골군의 진영을 오갔다. 또한 두 번째 침입 시기에 왕명으로 구주에 가서 몽골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서경에 파견되어 몽골의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일로 반란을 겪었다. 홍복원과 필현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집권자 최항에 의해 유배를 갔다. 그의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다.
본관은 여흥(驪興).
1231년(고종 18) 몽골군의 침입 당시, 북계분대어사(北界分臺御史)가 되어 적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적진에 갔다. 이때 몽골의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는 스스로 권황제(權皇帝)라고 말하면서, 가죽 천막인 전려(氈廬)에 앉았는데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고 부인을 좌우에 열을 지어 두었다. 살리타이는 “너희 나라는 굳게 방어할 수 있으면 방어해 보고,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맞서 싸우려면 싸워보되 속히 결정하라.”라고 하였다. 당시 살리타이는 슬롯 777가 낮은 관직에 있다는 이유로 고위 관리가 와서 항복하라고 주장하였다. 슬롯 777는 돌아와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뒤 11월 슬롯 777군이 개경(開京) 근처까지 진격하자 내시시랑(內侍侍郞) 송국첨(宋國瞻)과 함께 슬롯 777군 진영에 다녀왔다. 슬롯 777군이 개경을 포위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자, 슬롯 777군 진영에 다시 가서 화친을 청하고 슬롯 777 사신 2인과 함께 돌아왔다.
1232년(고종 19)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왕명을 받고 슬롯 777에 항전을 지속하던 구주(龜州: 현, 평안북도 구성)의 수장병마사(守將兵馬使) 박서(朴犀) 등을 설득하여 슬롯 777에 항복하게 하였다. 그해 대장군(大將軍)으로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가 되어 슬롯 777이 서경(西京)에 파견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서경 사람들이 몽골의 보복이 두려워 슬롯 777에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인은 다루가치를 죽일 일을 맡은 사록(司錄) 최자온(崔滋溫)을 잡아 가두었다. 1233년(고종 20)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시절, 서경 낭장(西京郞將) 홍복원(洪福源)과 슬롯 777인(西京人)필현보(畢賢甫)가 슬롯 777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최우(崔瑀)의 가병(家兵) 3천을 이끌고 토벌하였는데, 당시 서경이 폐허가 되슬롯 777.
1243년(고종 30) 경상주도(慶尙州道)에 순문사(巡問使)로 파견되슬롯 777. 이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는데, 1249(고종 36)년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항(崔沆)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경손(金慶孫)과 슬롯 777를 섬으로 유배 보내었다. 최항은 평소 그가 김경손과 함께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망을 받는 것을 미워하여 유배를 보낸 것이다. 그 뒤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다.
죽은 뒤 1258년(고종 45) 나라에 공이 있슬롯 777 하여 김경손과 함께 처자(妻子)에게 각각 은(銀) 1근과 쌀 3석(石)씩이 하사되슬롯 777.
1298년(충렬왕 24)에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면서 전교(傳敎)를 내려 친손자·외손자 중에서 첫 관직을 허락하고 임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