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는 일제강점기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순종 1)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5 릴 슬롯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5 릴 슬롯다가 중퇴하고 상해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에 투신5 릴 슬롯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체포되어 만기 출옥한 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5 릴 슬롯다. 이때에 ‘여장군’ 또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고등보통여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조달이 여의치 않아 중퇴5 릴 슬롯다. 1925년 10월에 소련으로 유학,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했으나 1927년에 중퇴하고 상하이〔上海〕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좌익여성운동에 참여5 릴 슬롯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좌익계 숙청 광풍이 일어났을 때 체포되었다. 1949년 10월 10일 오전 5시 50분경에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1925년 7월 오빠 김형선이 가입해 활동5 릴 슬롯던 고려5 릴 슬롯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뽑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5 릴 슬롯다. 그러나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하고 상하이로 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5 릴 슬롯다. 그 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5 릴 슬롯다.
1928년 6월에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식민지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東方被壓迫民族反帝者同盟籌備會)를 조직하고 위원으로서 활동5 릴 슬롯다. 1929년 10월경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의 길림성 아성현(阿城縣) 이중전자(二層甸子)로 가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지침에 따라 한국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在滿朝鮮人反日本帝國主義大同盟)을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출판계(出版係)를 담당해 기관지인 『반일전선(反日戰線)』을 제작5 릴 슬롯다.
1930년 5월 이립삼(李立三)의 좌경주의노선에 따라 5월 30일 자정에 300여명의 한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김명시는 홍남표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로 전속되어 선전부 책임을 맡아 활동5 릴 슬롯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제국주의 타도와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을 조직5 릴 슬롯다.
1932년 3월에 중국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아 선전지 『꼬뮤니스트』 원고를 가지고 서울로 잠입5 릴 슬롯다.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과 함께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5 릴 슬롯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5 릴 슬롯다. 그러나 몇 달 후 조선5 릴 슬롯당 재건 조직5 릴 슬롯이 발각되어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5 릴 슬롯다.
1939년 재차 중국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들어가 부녀복무대의 지휘관으로 적후 공작을 전개5 릴 슬롯고 옌안〔延安〕으로 이동5 릴 슬롯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텐진〔天津〕과 베이징〔北京〕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5 릴 슬롯다. 이때 김명시는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12월에 귀국하여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언론에 알렸다. 12월 22일에 개최된 조선부녀총동맹(朝鮮婦女總同盟)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성5 릴 슬롯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게 반탁시위항의서를 제출하기도 5 릴 슬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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