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단천군 단천면 용현리에서 부친 강통운과 모친 정송죽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호는 여천(黎泉)·취운(翠雲), 호는 프른 구름·국석(國石)이다. 첫돌이 될 무렵 부친이 사망한 후 외가에서 자라며 유치원 교육까지 받고, 꽁 머니 슬롯인의 입학이 쉽지 않았던 함흥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학도병 입대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월간지 『무궁화』와 『신생』의 편집장을 맡는 한편 무궁화가무극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1947년 귀국 후 건국대학교 법정대 정치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 활동했다. 1952년 『국제신보』에 「한국 민족 무용의 진로」라는 춤평론을 게재하면서 춤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후 부산 춤계의 발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63년 한성여자 초급대학 체육과에 춤이론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미학과 무용사를 가르쳤고, 1966년부터 부산평론가협회 무용분과 간사로 활동하다가, 1972년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 지부장 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1979년 부산여자대학교에 무용과가 개설되어 무용과장을 맡았고, 1984년 정년퇴임을 했다. 1982년 부산시 문화위원의 직책을 맡았으며, 작고하기 1년 전인 1991년 꽁 머니 슬롯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가무악 일체를 축으로 하여 예악관을 중시한 기운생동(氣運生動)의 미학적 산물로서의 꽁 머니 슬롯춤인 국무론(國舞論)을 강조하며, 꽁 머니 슬롯 춤계와 부산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공로예술표창(1972)·꽁 머니 슬롯예총예술공로상(1988)·부산시문화상(1993)·20세기 부산을 빛낸 26인상(2004)을 수상하였다. 그의 후학들이 2001년과 2002년에 추모집을 발간했으며[『(강이문 춤비평론집 1) 꽁 머니 슬롯 무용문화와 전통』1(민족미학연구소, 현대미학사, 2001); 『(강이문 춤비평론집 2) 우리춤의 전통과 창조성』(민족미학연구소, 현대미학사, 2002)], 정기적인 학술심포지엄과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