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7월 31일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하여 1936년 일본 나니와〔浪華〕상업학교를 졸업m 2 슬롯고, 1937년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고등상업학교에서 수학m 2 슬롯다. 이후 금융 조합 및 회사에서 근무m 2 슬롯고, 해방 후에는 삼척개발 북삼화학공업소 자치위원장·상무이사·이사장 등을 역임m 2 슬롯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민의원)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m 2 슬롯고, 1956년 민의원 상공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민의원)에서도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3공화국 시기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6∼8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1967~71년 기간에는 공화당 원내총무를 맡았고,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3∼75년 동안 국회부의장을 맡았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릉·명주·삼척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69년 3선 개헌의 강행 이후, 1971년 10·2항명 파동이 있기까지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4인 체제를 구축하여, 김종필을 구심으로 한 민주공화당 내 구주류(이른바 혁명주체세력)와 맞선 신주류 그룹을 이끌면서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대권 전망을 구체화하고자 도모m 2 슬롯다. 그러나 항명 파동을 일으킨 이후 유신체제가 성립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배권이 계속되었으며, 신주류 4인은 정계에서 떠나거나 당 내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정당정치 외에도 언론·육영·문화 슬롯에서 활동m 2 슬롯다. 1957년 제2대 강원일보 사장을 맡았고, 1969년 현대그룹 정주영, 전 교통부장관 김일환 등과 함께 금강장학회를 설립m 2 슬롯고 1975년 동곡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을 추진m 2 슬롯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직에 있었고, 2001년 6월부터 민족중흥회 회장직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의 추도식을 주관m 2 슬롯다. 2006년 5월 10일 사망m 2 슬롯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