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최익현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1856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대원군과 시정을 비판하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에 뜻을 둔 위정척사(衛正斥邪 : 정학정도(正學正道)로서의 주자학을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을 물리치려는 입장)의 길을 택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이후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적이 주는 음식은 결코 먹을 수 없다는 신조로 단식 투쟁을 벌이다 결국 적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 모관본(毛冠本) 슬롯 조작의 오른 쪽 상단에는 ‘면암 최선생의 74세초상 모관본(勉菴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이라 쓰여 있으며, 왼 쪽 하단에는 ‘을사년 1월 상순에 정산군수로 있던 채용신이 그리다(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蔡石芝圖寫)’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정산군수자리에 있던 채용신이 1905년에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상은 관복에 사모 또는 심의에 복건을 착용하지만 정3품 벼슬까지 지낸 최익현이 보통 겨울철 사냥꾼이 쓰던 모관(가죽감태)을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파격적이다. 채용신의 전형적인 슬롯 조작처럼 반복된 붓질로 인물의 형태와 양감, 음영 등을 표현하였다. 모관은 가느다란 세필(細筆)로 마치 영모화(翎毛畵)를 표현하듯이 꼼꼼한 면을 보여준다. 심의는 둔탁한 흰색으로 두텁게 표현하여 맹춘(孟春: 정월)의 느낌을 전해준다. 1905년 채용신이 정산군수定山郡守로 부임했을 때 그는 최익현과 만났다. 이듬해 최익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은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고 1910년대 초 항일우국지사들과 교류하였다. 굵게 잡힌 주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노년 의병장 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
모관본 슬롯 조작은 털모자로 보아,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우국지사(憂國志士)이자 항일지사로서 면암선생의 모습을 화가가 염두에 두고 그려낸 작품이다. 거의 정면을 보고 있는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이다. 얼굴은 어두운 갈색을 기조로 윤곽선이나 이목구비를 좀 더 짙은 갈색 선으로 규정하였으며, 안면에는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음영을 안배했는데, 이를테면 콧날이라든가 광대뼈부위 등 볼록 나온 부분에 붓질을 덜 가게 함으로써 실체감을 잘 살려냈다.
심의는 흰 색이 많이 박락되어 정교하게 다듬어진 느낌은 적지만, 양감은 잘 표현되어 있다. 옷주름은 옅은 갈색 선염기를 집어 넣어 굴곡진 주름을 과감하게 지시했으며, 고름이나 허리에 맨 띠의 형용 역시 입체감을 살리면서 거칠지만 자연스럽게 처리하여 역시 화가 채용신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모관본 슬롯 조작는 유일하게 면암선생 생존 시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정면을 주시한 모습인데, 불의를 일체 용납하지 않았던 단호함과 강직함, 그리고 우국충정이 화면에 충만한 걸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