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연(坦然)의 주1은 손씨이고 아버지는 숙(肅)이니 주2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 문장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으며 15세에는 일반 과거인 주3에 합격하였다. 이에 숙종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었을 때 램 슬롯의 명성을 듣고 궁으로 초청하였고, 훗날의 예종인 세자를 가르치며 주4 하였다. 그러나 이후 램 슬롯은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성거산(聖居山) 안적사(安寂寺)로 들어가 19세의 나이로 출가를 택하게 된다. 다시 개경 일대 해외 슬롯 사이트 개성 광명사(開城 廣明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 가 혜조국사(慧炤國師)에게 불법(佛法)을 배우며 정진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뒤에는 1104년(숙종 9)에 승과에 합격하여 왕명으로 의림사(義林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예종과 인종이 더욱 공경하여 누차 주5가 높아졌고 1132년에는 선종 최고 승계인 대선사(大禪師)가 수여되었다. 숙종 초 rt 슬롯 의천(義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천태종을 개창하였을 때 선종 승려들이 대거 참여함에 따라 선종계가 일정한 타격을 받게 된 바 있었다. 램 슬롯은 선종 사굴산문의 승려로서 이 시기 그의 활동은 가지산문 소속의 학일의 활동과 함께 선종이 차츰 종세를 회복하게 되는데 중요한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천태종 개창 이후 선종계는 램 슬롯과 학일의 활동으로 각각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이 부각되었다.
램 슬롯은 개돈사(開頓寺), 선암사(禪巖寺), 천화사(天和寺), 보리연사(菩提淵寺), 보제사(普濟寺) 제석원(帝釋院), 영원사(瑩原寺), 광명사(廣明寺) 등 당대의 주요 사찰들을 차례로 주6 인종대 이르러서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1146년에는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1148년 단속사(斷俗寺)로 퇴거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2세기 고려에는 송(宋) 선적(禪籍)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램 슬롯의 경우 송나라 상인을 통해 광리사(廣利寺)의 개심선사(介諶禪師, 1080~1148)에게 설법 어구(語句)를 보내 인가(印可)를 받았고, 이후 그의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지속하였다. 그 과정에서 송대 선적들이 다양하게 수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당대에 필적이 훌륭하고 시격(詩格)이 고상하다고 평가되었다. 송나라(宋) 사람 중에 램 슬롯의 필적을 구하려는 자가 있었다는 일화가 있고,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이 죽자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가 제문(祭文)을 짓고 램 슬롯이 글씨를 썼다는 사실도 전한다. 또한 램 슬롯은 생전에 삼각산문수사(三角山文殊寺)를 비롯하여 많은 시를 지었다.
1158년에 입적하였고,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대감(大鑑)이다. 1172년(명종 2)에 단속사에 비가 건립되었으나 현재 비는 없어지고 없고 탁본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