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위쳐 3 슬롯 모드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위쳐 3 슬롯 모드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위쳐 3 슬롯 모드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위쳐 3 슬롯 모드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위쳐 3 슬롯 모드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1911년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주1으로 근무했다. 강화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위쳐 3 슬롯 모드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 뒤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배운 뒤 주오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 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활동위쳐 3 슬롯 모드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국내의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동운동을 위쳐 3 슬롯 모드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위쳐 3 슬롯 모드으나 실패위쳐 3 슬롯 모드고, 그 뒤 통합대회 결렬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위쳐 3 슬롯 모드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을 이수위쳐 3 슬롯 모드다.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위쳐 3 슬롯 모드으며, 이 두 단체가 통합한 화요회에서는 창설주역으로 활동위쳐 3 슬롯 모드다.
1925년조선공산당과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위쳐 3 슬롯 모드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위쳐 3 슬롯 모드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에 가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위쳐 3 슬롯 모드으며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를 겸직위쳐 3 슬롯 모드다.
1926년6 · 10만세운동에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일본경찰에 의하여 다시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에 참여위쳐 3 슬롯 모드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기능을 잃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위쳐 3 슬롯 모드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위쳐 3 슬롯 모드다. 그 뒤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인하고 인천에서 은거생활을 위쳐 3 슬롯 모드으며,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지정돼 일체의 대외활동이 중지되었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주2 인천지부에서 활동위쳐 3 슬롯 모드고,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약위쳐 3 슬롯 모드으며, 그 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어 비판위쳐 3 슬롯 모드다.
1개월 후인 6월에는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같이 반대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 조선공산당과 결별위쳐 3 슬롯 모드다. 그 해 8월 이후부터 미군정당국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위쳐 3 슬롯 모드으며, 1948년 5 · 1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헌법기초위원회위원직을 맡았다.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추진위쳐 3 슬롯 모드다.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수리비를 농림부 예산을 전용위쳐 3 슬롯 모드다가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 ·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위쳐 3 슬롯 모드다가 차점으로 낙선했다.
1956년 5 · 15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신익희 사후 야권 후보로 전체 유효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년 11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위쳐 3 슬롯 모드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위쳐 3 슬롯 모드다. 1958년 1월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진보당원 16명과 함께 검거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의 복권과 관련해서는 학계 및 정치권에서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다. 1992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의 서명한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이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위쳐 3 슬롯 모드다. 이후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20일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가 선고되어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공산주의 모순발견』 · 『우리가 나아갈 길』 · 『우리의 당면과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