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년(성종 20)에 국왕이 성균관과주1의 유생들에게 학문을 격려하기 위하여 대궐 앞뜰에 불러 모아 프리 슬롯을 치르게 한 뒤 성적 우수자에게 주2, 직부회시의 자격을 부여하던 유생 정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정시가 급제를 하사하는 프리 슬롯로 승격되고, 문무일체(文武一體)의 원칙에 따라 무과도 함께 실시된 것은 중종 대였다. 이후 프리 슬롯는 국가나 왕실의 각종 경사가 있거나 문신 대상의 중시(重試)가 실시될 때 프리 슬롯와 무과에서 함께 실시되는 시험으로 자리잡아 갔다.
정시 프리 슬롯는, 정시 무과가 프리 슬롯와전시의 두 단계로 프리 슬롯되던 것과 달리, 국왕이 몸소 참석한 가운데 치루어지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었다. 따라서 당일에 급제자를 발표하여야 했기 때문에 시권을역서(易書)하지 않고 채점하였으며, 시관의상피제(相避制)도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프리 슬롯가 유생 프리 슬롯에서 기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프리 슬롯의 목적은 권학(勸學)이어서 되도록 많은 유생들이 응시할 수 있도록 녹명(錄名) 절차도 매우 느슨하게 운영하였다.
따라서 정시 프리 슬롯에서는 채점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았으며, 서체가 중시되면서 응시생이 차서(借書)를 위하여 서리 등 주3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녹명 절차가 허술하여 응시생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문제들이 속출하였다. 또한 영조 대에는 프리 슬롯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경과(慶科) 중에서증광시와별시를 대신하여 정시를 프리 슬롯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정시 운영 상의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1743년(영조 19)에 프리 슬롯 운영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프리 슬롯에 프리 슬롯를 설치하되, 국왕이 몸소 나올 경우에만 초시를 생략한다는 것이었다. 정시 프리 슬롯에 초시가 설치되면서 녹명 단계에서는 주4, 조흘첩(照訖帖) 등으로 응시자의 신원과 응시 가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초시는 응시생을 서울에 모아 3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전시에서는 시권을 역서한 뒤에 채점하였다. 그러나 정시 프리 슬롯에 초시를 설치하는 것은 1766년(영조 42)까지만 이루어지고 그 이후 폐지되었다가 정조 대에 부활되었으며, 1844년(헌종 10)부터는 초시를 서울과 주5으로 나누어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