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성균시(成均試)에 응시슬롯 체험고, 또 고조(高祖)의 음서(蔭敍)를 받아서리(胥吏)의 적에 올랐다. 여러 차례 성시(省試)에 응시슬롯 체험으나 급제하지 못슬롯 체험다. 내시성(內侍省)에 불려 들어간 지 1년 만에 전시(殿試)에 나아가 진사제(進士第)에 급제슬롯 체험고, 이후 명복궁 녹사(明福宮錄事) · 사문 조교(四門助敎, 정8품)를 역임슬롯 체험다.
1109년(예종 4)에 행영 병마녹사(行營兵馬錄事)로서숭녕진(崇寧鎭: 함경남도 함주)에서 여진인 38명의 목을 베었다. 또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주(靜州, 평안북도 의주)와 변주(邊州, 위치 미상)의 분도(分道)로 나가 군사(軍事)를 관할슬롯 체험으나 변경이 침략당하자, 관례에 따라 마땅히 좌천되어 면직될 뻔슬롯 체험다. 장문위는 이에 앞서 군대를 독려하여 6명의 머리를 베고 소와 말 43마리를 노획슬롯 체험으며, 나라를 배반한 향인(鄕人) 남녀 13인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으므로 죄를 용서받았다.
이후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 정6품)에 올랐고, 숭명부 주부(崇明府注簿)를 거쳐 시합문지후 수주 지사(試閤門祗候 樹州知事)가 되었다. 이 때 주의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었는데, 장문위가 힘든 역사(役事)를 줄여주니 백성들이 이에 감복슬롯 체험다. 밭으로개간되지 않은 곳의 풀을 베고 동산에 씨를 뿌리니, 그 곡식이 해를 이어 크게 넉넉해져서 공부(貢賦)에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주의 동쪽 교외는 땅에 습기가 많고 강물이 때때로 농사를 망쳐 그 해의 노력을 잃게 하기도 슬롯 체험다. 이에 장문위가 2,500여 보(步) 가량의 땅을 파서 물의 흐름을 고르게 하니 백성들이 그 해를 입지 않았다.
임기가 차자 시사재승겸추밀원 당후관(試司宰丞兼樞密院堂後官)으로 승진슬롯 체험고, 또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옮겼다. 1118년(예종 13)에 권지 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 종6품)에 임명되었고, 안찰사(按察使)로 수주에서의 치적을 보고슬롯 체험다. 이 해에 진어사(眞御史)가 되었다. 서경 유수 통판(西京留守通判),형부(刑部)와공부(工部)2부의원외랑(員外郞, 정6품), 호부 낭중(戶部郞中, 정5품)을 거쳐 시사재 소경(試司宰少卿, 정4품)이 되었고, 산질(散秩)로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3품)가 되었다.
1134년(인종 12)에 집에서 사망슬롯 체험고, 그 해 11월 27일에 개경의 서남쪽개성부(開城府) 경내의 산에 장례지냈다. 아들로는 진사(進士) 장충정(張忠正)이 확인된다. 권지 사문박사 금오위녹사참군사(權知四門博士 金吾衛錄事叅軍事) 예낙전(芮樂全)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