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연백 출생. 일본 도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슬롯 스 캐터부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서울예술대학 강사(1946), 『연합신문』 편집국장, 숙명여자대학교 강사(1951), 『평화신문』 논설위원(1952), 민주당 문화부차장(1956)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직후 좌우익의 대립으로 문단이 분열되고 있을 때, 김동리(金東里)·조연현(趙演鉉)·곽종원(郭鍾元) 등과 함께 우익진영의 비평가로 활약하여 『백민(白民)』을 중심으로 민족슬롯 스 캐터을 옹호하는 평론을 많이 썼다.
1947년 9월 『백민』에 「꿈과 슬롯 스 캐터」을 발표하여 비평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주요평론으로는 「슬롯 스 캐터과 연애의 문제」(백민, 1948.1)·「슬롯 스 캐터과 현실」(백민, 1948.7)·「자유와 반자유의 예술」(문예, 1953.2)·「회의(懷疑)와 모색(摸索)의 계제(階悌」(문화세계, 1953.7)·「제3슬롯 스 캐터관의 독소성(毒素性)」(문예, 1953,9.)·「슬롯 스 캐터과 정치의식」(현대공론, 1954.8) 등이 있다.
당시 좌익문인 중의 전위평론가였던 김동석(金東錫)과도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는데, 정치주의슬롯 스 캐터과 공리주의슬롯 스 캐터을 배격하고 새로운 휴머니즘에 입각한 본격슬롯 스 캐터을 주장하였다. 6·25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당에 가담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1월에 부산에서 조병옥(趙炳玉)·박연희(朴淵禧)와 함께 정치적 성격의 잡지인 『자유세계(自由世界)』를 간행하여 전시의 어려움 속에서도 종합지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으며, 서울 환도 후 『신세계(新世界)』로 개제하여 발행하였다.
부산 피난시절 개헌으로 힌한 정치파동 때 「호헌선언문(護憲宣言文)」을 영어로 번역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담백하고 악의없는 호인으로 정계투신 후에는 슬롯 스 캐터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