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m 2 슬롯(聾巖)·설빈옹(雪鬢翁). 예안 출신. 아버지는 참찬 이흠(李欽)이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m 2 슬롯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m 2 슬롯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m 2 슬롯,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m 2 슬롯 문학사에서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됐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