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烏川). 평장사(平章事) 이지저(李之氐)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심(李深)이다.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해 우정언·우헌납·예문응교를 슬롯 가입 머니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슬롯 가입 머니 이듬 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 해 첨서의흥삼군슬롯 가입 머니(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奔競: 大官이나 권세가를 찾아다니면서 엽관이나 이권운동을 함)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사평부우사를 슬롯 가입 머니 예문관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슬롯 가입 머니 이듬 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의 접반사가 되었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 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슬롯 가입 머니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閔無疾) 사건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三司申判)’이라는 글 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으로 바꿀 것을 주장, 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해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의 금계사(金溪祠), 대구의 서계서원(西溪書院), 함안의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슬롯 가입 머니. 시호는 공도(恭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