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슬롯은 작업현장에서 노동자나 잡부들을 직접 감독하고 지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댄 슬롯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회사에 직접 고용되어 직영 일꾼들을 통솔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소상품생산자로 존재하는 독립 댄 슬롯이 하청(도급)의 고리를 통하여 고용되는 경우이다.
이 가운데 두번째 유형이 댄 슬롯제도의 전형이다. 독립 댄 슬롯은 한 마디로 노동계약자(labor-only contractor)라고 할 수 있다.
하청회사나 청부업자와 임금 및 근로조건을 협상하여 일거리를 하청받고, 기능공 및 잡부 등으로 자신의 작업조를 조직하여 계약대로 해당 작업을 완성시키는 임무를 담당한다.
따라서 댄 슬롯은 회사 조직체계에서는 회사에 고용된 작업반장이지만, 일꾼들에게는 고용주가 된다. 댄 슬롯은 일꾼들을 모집하거나 해고하고, 작업 배치와 감독을 하는 한편, 정액도급받은 임금을 자신이 동원한 일꾼들에게 분배하는 권한을 갖는다.
댄 슬롯제의 전형은 부두 하역작업장과 건설사업장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 각 산업부문이 지닌 노동과정의 성격이 상이하여 서로 전혀 다른 존재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나라 댄 슬롯제는 항만 하역작업장에서 먼저 정착되었다. 개항 후 인천·부산·목포 등 부두에는 인부들을 감독하는 댄 슬롯과 댄 슬롯들을 감독하는 접장(接長)이 있어서 항만노동자들의 작업활동을 규제해왔으며, 그 뒤 댄 슬롯·반장제로 개편, 존속해왔다.
광복 후에는 그것이 노동조합의 틀로 탈바꿈하여 노동자에 대한 중간 착취의 길을 열어놓았으며, 이 댄 슬롯·반장제를 기초로 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노동귀족을 기르는 온상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즉, 부두 노동조합의 예를 들면 각 하역회사마다 노동조합 분회가 있고, 댄 슬롯은 이 분회의 분회장을 가리킨다. 댄 슬롯은 하역회사와 근로조건을 협정하는 한편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노동자를 관리하는 이중 임무를 담당하는데, 댄 슬롯의 중간 착취는 이러한 계약구조와 댄 슬롯의 권한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0명의 부두 노동자가 1개의 반을 편성한다고 하면 노동자의 임금은 댄 슬롯 몫까지 합쳐 임금총액의 11분의 1로 나누어야 한다. 따라서 하루에 30개 반이 작업을 한다면 댄 슬롯의 몫은 무려 노동자 30명 몫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두 댄 슬롯제의 여러 가지 부조리와 이중 삼중의 중간 착취는 하역작업 과정의 특성과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노동 통제의 일반화라는 역사적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서, 노동운동이 조직화하면서 이를 둘러싸고 횡령 고발, 진상규명 조사 등 사회 및 정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한편, 건설업 부문 댄 슬롯제는 건설업의 자본주의 방식의 생산이 시작된 일제시대부터 댄 슬롯을 통한 정액 하청제 형태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건설업 부문의 댄 슬롯은 직접 현장에서 노동자를 지시, 감독하고 기술적 결정을 내리는 등 노동과정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하청업자로는 볼 수 없고 사회적 분업관계와 기술적 분업관계 속에서 중첩적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댄 슬롯은 재료나 자재 구입은 건물주나 다른 하청업자에게 맡기고 자신이 동원한 노동력에 대해서만 일정액으로 도급받아 임금을 지불하고 남는 몫을 차지한다.
또한 댄 슬롯 자신이 연장을 잡고 일을 하기 때문에 몫은 ‘자기 노동에 대한 임금+이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상 그 이윤의 크기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댄 슬롯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청부업자에 대한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낮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청의 고리가 길어져 실제로 일꾼을 동원하여 작업을 하는 댄 슬롯에게 도달하기까지 4, 5단계의 재하청을 거치기 때문이다.
하청 고리의 말단에 있는 영세 댄 슬롯에게는 하청액 자체가 공사를 차질없이 진행해야만 약간의 이윤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대체로 독립 댄 슬롯의 하루 몫은 기능공 일당의 약 1.5배 정도이다. 그러나 일꾼을 고용한 고용주인 댄 슬롯은 청부업자와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기간마다 일당을 지불해야 하는 압력을 받는다. 지불 능력이 없으면 댄 슬롯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설작업장의 댄 슬롯이 갖추어야 할 요건은 기능 숙련뿐 아니라 임금만은 밀리지 않는 자금 능력, 적정수준의 정확한 견적 능력, 효율적인 인원 규모 관리능력 등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생계 유지가 힘든 현실에서 기능공이 댄 슬롯으로, 댄 슬롯이 청부업자로 상승 이동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형편이다.
한편, 하나의 작업조를 이룬 댄 슬롯과 기능공 및 일꾼의 관계에는 소상품생산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단순한 형식의 계약관계라기보다는 복합적인 인간관계를 포함한 보호자-종속자(patron-client)관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건설업 부문에는 소상품생산적 요소를 지닌 댄 슬롯제도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데, 주된 이유는 건설업의 특성 자체에 있다.
주문생산이 가져다주는 수요의 불안정성, 생산의 거대성 및 장기성, 작업장의 이동성 및 옥외성, 기술의 기예적 성격, 협업의 필요성, 그리고 시장의 불확실성 등에 대처하려면 노동력의 효과적 동원과 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댄 슬롯을 통한 정액 하청제의 도입은 효율적 협업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작업조를 임시고용으로 동원할 수 있을 뿐더러, 생산량과 임금을 연동(連動: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조정함)시켜 효율적인 노동 통제와 노동생산성 제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시장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을 노동측에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