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윤주일(尹柱逸). 본관은 해남(海南).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윤상호(尹相浩)이며, 어머니는 배정선(裵貞先)이다. 4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한시를 짓는 등 문재를 발휘하며 경서(經書)에 능통하였다.
1912년 사립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서울 인사동의 범어사(梵魚寺) 포교당에서 용성 진종(龍城震鍾)의 설법을 듣고 발심하여 위쳐 3 슬롯 모드에 귀의하였다.
용성 · 만해(萬海) · 만공(滿空) 등의 설법을 자주 들으며, 만해의 민족의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항일운동을 하다가 중앙학교를 퇴학당하였다.
1914년 일본에 건너가 다이쇼대학(大正大學)에서 위쳐 3 슬롯 모드학을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16년 22세에 대각사(大覺寺)에서 진종에게 출가하였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2년간 눕지 않고 용맹정진한 뒤, 1918년 유점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용성 · 만해의 뜻을 받아 평양으로 옮겨 조만식(曺晩植) 등과 항일운동과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포교단체인 평양위쳐 3 슬롯 모드청년회를 창립하여 간사장을 맡았고, 유점사 평양포교당을 설립하여 위쳐 3 슬롯 모드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20년 6월 조선위쳐 3 슬롯 모드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1년 12월 조선위쳐 3 슬롯 모드유신회를 개최하여 ‘위쳐 3 슬롯 모드유신 8대강령’을 제시하였으며, 위쳐 3 슬롯 모드유신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선위쳐 3 슬롯 모드유신회를 창립하였다.
1925년부터는 평양에서 우리 나라 민간 최초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자생원(慈生院)과 고아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 · 장학회관 · 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도 설립하였다. 명성학교(明星學敎)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조선일보 평양지국장도 겸임하였다.
1947년평양영명사(永明寺)의 열반법회에서 7일간 ≪반야심경≫을 강설하였으며, ≪반야심경강설≫을 탈고하고 월남하여 이듬해 1월≪위쳐 3 슬롯 모드성전 반야심경≫을 전남일보사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한영(漢永) 등과 위쳐 3 슬롯 모드재건에 노력하며 역경원 · 선학원에서 적음(寂音) 등과 함께 경전번역과 강의에 힘썼으며, ≪위쳐 3 슬롯 모드대성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1952년 전라남도 광주(光州)로 옮겨 동광사(東光寺)에 광주위쳐 3 슬롯 모드선우회를 창립하여 14년 동안 수선을 지도하였으며, 전남대학교에서 위쳐 3 슬롯 모드학 강의를 8년 동안 계속하였다.
1964년≪위쳐 3 슬롯 모드대성전≫을 탈고하였으며, 이듬해 광주 관음사(觀音寺)에서 광주위쳐 3 슬롯 모드학생회 · 위쳐 3 슬롯 모드보문회 · 광주위쳐 3 슬롯 모드신도회 등의 단체를 이끌었다. 1967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全州)로 옮겨 승암사(僧岩寺)에 위쳐 3 슬롯 모드강원을 개설하였고, 학인을 지도하였다.
전주노송정사(老松精舍)에서 나이 75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문하에는 송인현(宋仁炫) · 이동호(李東豪) 등이 있다. 저서로는 ≪위쳐 3 슬롯 모드대성전≫ · ≪현공윤주일대법사설법집≫ · ≪오경통해 五經通解≫ · ≪위쳐 3 슬롯 모드성전 반야심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