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산으로도 불리는 다복 이 슬롯산 줄기의 해발 350∼600m 능선에 쌓은 산성이다. 길이가 3km에 가까운 큰 규모로,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 전북특별자치도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처산성(三處山城)으로 불렸다. 1380년(우왕 6) 9월 왜구가 남원성을 공격하고 운봉현을 약탈한 뒤, “광주의 다복 이 슬롯(金城)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고서 북상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복 이 슬롯’은 다복 이 슬롯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축조에 대해서는 1410년(태종 10), 1597년(선조 30), 1610년(광해 2), 1653년(효종 4)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804척이며, 성 안에 9곳의 샘과 제사처인 신사(神祠)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혹은 신라말 고려초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다복 이 슬롯되었다.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다복 이 슬롯되었을 듯하다. 1237년(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이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이들은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다복 이 슬롯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다복 이 슬롯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다복 이 슬롯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