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넷 엔트 슬롯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주1(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2(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고,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넷 엔트 슬롯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으며,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 그밖에 백성들에게 불효 · 불목 · 음행 · 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이와 같이, 당시 고부군 일대에는 누적된 봉건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어 넷 엔트 슬롯의 불만이 축적, 고조된 상황에서 전봉준의 지휘로 봉기하게 되었다.
1월 10일 새벽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넷 엔트 슬롯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넷 엔트 슬롯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뒤 악질적인 이서배(吏胥輩)들을 문초하였다. 또한,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넷 엔트 슬롯들에게 반환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白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넷 엔트 슬롯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으로 전환될 기세였다.
이 때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실책은 넷 엔트 슬롯군을 더욱 자극하였다. 전봉준은 사방에 격문을 띄웠으며, 3월 21일 백산에서 봉기한 이후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우발적인 것이나 촉발적인 것이 아니라, 1893년 3월의 보은집회 후, 호남동학넷 엔트 슬롯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봉건 · 반외세 운동이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의 동학 지방 접주들에 의해 뚜렷한 목표 아래 계획된 것이었다. 근래 발견된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해 준다.
고부민란은 동학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