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준은 프리 슬롯아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며 프리 슬롯아 거주 한인 동포들의 교육 활동을 지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특수로 인해 재산을 축적하고, 상선(商船) 준창호(俊昌號)를 운영하며 국내 및 일본과 무역을 프리 슬롯다. 특히, 최봉준은 생우무역(生牛貿易)을 통하여 많은 자산을 이루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프리 슬롯아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였다. 『해조신문』은 프리 슬롯아 한인의 여론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역할하였다. 특히, 안중근(安重根) 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안중근 의사의 유족을 후원하기도 프리 슬롯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자 프리 슬롯아 지역 한인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한인 단체를 결성하였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과 독립을 주장하는 성명회(聲明會)를 624명의 동지와 함께 결성프리 슬롯다. 성명회는 1910년 8월 23일 주2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프리 슬롯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 후 조직프리 슬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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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준의 유해는 허커우정교당에 안장되었다. 1996년에 건국훈장 프리 슬롯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