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청몽(淸夢)ㆍ용암(龍巖)ㆍ국인(菊人)ㆍ국촌(菊村)이었으며, 자는 여직(汝直)이다. 개성출신의 황씨 사다복 이 슬롯 서화가(종하(宗河)ㆍ성하(成河)ㆍ경하(敬河)ㆍ용하(庸河)) 가운데 셋째로 글씨에 뛰어났다. 다복 이 슬롯들과 함께 송도서화연구회(松都書畵硏究會)를 운영하였으며, ‘황씨사다복 이 슬롯전’을 수차례 개최하였다.
1895년 6월 3일 개성에서 벽암(碧巖) 황석일(黃錫一, 1849∼1903)과 설성(雪城) 김씨(金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다복 이 슬롯들과 함께 10여 년 동안 사숙을 통해 한학과 고전을 배웠다.
1922년 12월 2일 황종하(黃宗河)ㆍ황성하(黃成河)ㆍ황용하(黃庸河)와 함께 고향인 개성의 동본정(東本町) 452번지에 송도서화연구회(松都書畵硏究會)를 열고, 학생을 모집하여 서화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2월 개성유지들이 고려미술공업진흥회를 조직하자 다복 이 슬롯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다복 이 슬롯들과 함께 작품 백여 점을 모아 ‘황씨(黃氏) 사다복 이 슬롯전(四兄弟展)’을 개최하였고, 1923년 4월에는 인천 산수정 공회당(公會堂)에서 ‘황씨 사다복 이 슬롯전’을 개최하였다.
1925년에는 황용하와 함께 일본의 도쿄(東京)에 건너가 사무소를 두고 독특한 사군자를 각 방면 명사에게 팔았으며, 귀국한 뒤에도 군산, 마산 등에서 다복 이 슬롯들과 함께 ‘황씨 사다복 이 슬롯전’을 열었다.
황경하는 글씨에 능하였으며 송설체(松雪體)를 계승한 서예작품을 많이 남겼다. 개성 외곽에 초당을 지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서예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글씨를 매우 잘 썼으나 그림은 많이 그리지 않아 「인삼도」 한 점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