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 이 슬롯 홍우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대사간,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웅(仲熊)
서암(西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2년(현종 3)
사망 연도
1716년(숙종 42)
본관
남양(南陽)
주요 관직
이조좌랑|대사간|우승지
• 본 항목의 다복 이 슬롯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대사간,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웅(仲熊), 호는 서암(西巖). 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처후(洪處厚)이고, 아버지는 부사 홍수량(洪受湸)이며, 어머니는 조송년(趙松年)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충주의 유학(幼學) 최세일(崔世鎰)에 의해 삼촌 홍수헌(洪受瀗)의 사(私)로 등과했음을 비판받았다. 1703년 가주서로서 대내출입(大內出入)의 문제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다복 이 슬롯가 다시 설서로 기용되다복 이 슬롯.

이듬 해 검열이 되었고, 1708년 신하들의 상소 내용이 정원(政院)에서 바뀌어 기록되는 잘못에 대해 주서로서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한 뒤 정언이 되다복 이 슬롯. 그 해『대학연의(大學衍義)』를 헐뜯는 박행의(朴行義)의 성토를 청하는 소를 올렸고, 부수찬이 되다복 이 슬롯.

1709년 부교리가 되어 공주의 제택(第宅)을 마련하는 데 부조리함을 지적해 상소다복 이 슬롯. 1710년 수찬·부교리가 되고, 이어 교리에 올랐다. 재임 중 과거 합격자 발표시에 봉함을 뜯어 바꾸어 발표하는 부정이 있음을 상소다복 이 슬롯.

또한 박세당(朴世堂)의 손자 박필기(朴弼基)가 상식(上食: 상가에 아침과 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의 폐지를 유언한 그 할아버지에 대해 변명한 것을 논박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같은 달에는 언관의 직언정론(直言正論)에 대해 임금에게 소대(召對)해 성지(聖旨)를 거스르면서 무안으로 귀양갔다.

1712년 풀려나 은율현감으로 강등, 보직되다복 이 슬롯가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에 의해 내직으로 복직되어 수찬이 되다복 이 슬롯. 그 해 장령이 되어 돈화문 개폐(開閉)에 관한 조례를 세울 것과, 또한 옥사처리에 엄정을 기할 것을 상소하고, 이어서 이조좌랑이 되다복 이 슬롯.

1713년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 등이 청한 존호를 받지 말도록 숙종에게 연명으로 소를 올리면서, 이조정랑·헌납이 되다복 이 슬롯. 그리고 우황(牛黃)을 얻고자 수많은 소를 잡게 하는 숙종의 하명을 철회하도록 간청해, 곧 교리·승지가 되다복 이 슬롯. 1714년 대사간에 승진한 뒤, 이듬해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다복 이 슬롯.

1715년『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에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윤증(尹拯)을 비난한 정호(鄭澔)를 변호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고 서주현감(西州縣監)으로 좌천되다복 이 슬롯. 다음해 『가례원류』 시비에서 승리한 노론이 집권하기 전에 죽다복 이 슬롯. 시문에 능했으며, 당대 명필로서 특히 예서에 능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항목 다복 이 슬롯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다복 이 슬롯,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다복 이 슬롯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