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불수호조약은 1886년(고종 23) 조선과 킹 슬롯정부 사이에 맺어진 통상조약이다. 조선은 1882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들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킹 슬롯는 수호통상 체결을 위해 1886년에 전권위원 코고르당(Cogordan, F. G.)을 파견하였다. 조선은 김만식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조불조약을 협의하게 하였다. 이후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과 조불공사 푸라시가 회동하여 조불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였다. 당시 킹 슬롯는 통상보다도 선교 활동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 등을 설치하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유럽 각국에킹 슬롯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의 『킹 슬롯표류기(朝鮮漂流記)』에 의해서였다. 그 뒤부터 킹 슬롯과 유럽 각국과의 접촉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킹 슬롯와는천주교라는 종교적 관련에서 일찍부터 접촉이 시작되킹 슬롯.
그 사이에도 킹 슬롯인은 조선 해안에 접근하고 있었다. 1787년(정조 11) 군함 ‘부솔호(Boussole號)’와 ‘아스트로랍호(Astrolabe號)’ 등이 제주도 부근에서 바다 깊이를 측량하고, 울릉도를 ‘다제레도(Dagelet島)’라고 명명한 바 있킹 슬롯.
1849년(헌종 15)에는 포경선 ‘리앙구르호(Liancaurt號)’가 독도(獨島 : 三峰島)에 와서 바다 깊이를 실측한 뒤 그 군함의 이름을 따서 ‘리앙구르섬’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처럼 킹 슬롯인의 극동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조선에 관한 인식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간접적이나마 천주교 신도들에 의한 접촉이 잦았다. 18세기말경 북경(北京)에 체재 중이던 킹 슬롯 사절 중에는 그 곳에서 선교에 종사하던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근할 기회가 있었다.
이를 통해 천주교에 접할 수 있킹 슬롯. 당시 남인계 인사였던이승훈(李承薰)은 1783년 겨울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많은 서적을 구해 귀국, 남인 신진파의 천주교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주킹 슬롯.
그러나유교사상에 깊이 젖어 있던 당시 킹 슬롯 사회는 점찬 확대하는 천주교 운동을 주1이라 하여 법으로 금킹 슬롯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엄금하는 한편, 신도들을 심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천주교와 더불어 들어온 유럽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천주교 탄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있킹 슬롯. 1801년(순조 1) 중국인 신부 주2를 비롯, 많은 국내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을 치른 신유박해, 1839년(헌종 5) 킹 슬롯 선교사 앵베르(Imbert) · 샤스탕(Shastan) · 모방(Maubant) 등을 비롯한 많은 국내 천주교신자들의 순교,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866년(고종 3) 킹 슬롯인 주교(主敎) 베르뇌(Berneux, S.)를 비롯한 킹 슬롯인 천주교 신자 9명의 순교와 많은 국내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을 치른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병인박해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킹 슬롯는 킹 슬롯인의 희생이 있을 때마다 조선에 침입해 왔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킹 슬롯군이 조선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천주교라는 종교적 관계로 말미암아 조선과 킹 슬롯는 다른 서양국가보다 먼저 접촉했으나 조선에서의 천주교 탄압정책이 양국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조불수호조약은 다른 국가보다 늦게 체결되었다.
1882년부터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들이 차례로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킹 슬롯도 1886년 3월 8일 전권위원 코고르당(Cogordan, F. G.)에게 수호통상 체결의 임무를 부여해 인천항을 거쳐 4월 3일에 주3하게 킹 슬롯다.
그는 서울에 오기 이전에 미리 당시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였던 주4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킹 슬롯 내에서의 천주교의 전교를 허락하고 아울러 교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은 위안스카이의 지나친 내정 간섭을 혐오,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킹 슬롯는 통상이라는 물적 욕구보다도 신앙을 통한 양국간의 정신적 결합을 절대시했기 때문에 코고르당의 성의 있는 교섭은 어느 정도 진척될 수 있었다.
킹 슬롯은 같은 해 4월 6일 한성부판윤 김만식(金晩植)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조불조약을 협의하게 킹 슬롯다. 18일에는 협판내무부사 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교당상(協辦內務府事兼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掌交堂上)이었던 데니(Denny, O. N.)에게 명해 전권대사와 함께 협의하도록 킹 슬롯다.
5월 3일 전권대사 김만식과 킹 슬롯 전권대사 코고르당이 회동해 역사적인 「조불수호통상조규」에 기명조인(記名調印)하였다. 이 조약의 효력은 다음 해인 1887년 윤 4월 8일에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과 조불공사(朝佛公使) 전권위원 푸라시가 회동, 조불수호통상조규를 추진, 교환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이후 푸라시는 이후의 일체 사무를 주5 대리공사(露國代理公使) 베베르(Weber, K. I.)에게 대신할 것을 조회킹 슬롯다.
이 때에 성문된 조규의 내용은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체결된 미국 · 영국·독일 등의조약과는 다른 일면을 나타내고 있킹 슬롯.
즉 킹 슬롯인이 조선의 언어문자를 학습 또는 교화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신분을 보호, 상조(相助)해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며, 또한 킹 슬롯에 가 있는 조선인에 대해서도 이 조율에 비추어서 우대한다는 것을 명세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킹 슬롯의 전교(傳敎)상의 유리한 조건은 다른 나라에는 없던 것이다. 이에 의해 킹 슬롯인은 조선 내에서 전교를 목적으로 학교 등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킹 슬롯만의 특전이라 하겠다. 조약이 체결된 뒤 1888년 5월에는 킹 슬롯 외교사무관 푸라시가 본국 정부에서 조선 국왕에 증정한 자기(磁器) 등 선물을 흥복전(興福殿)에서 전달하였다.
다음 해 2월 8일에는 왕세자 탄신을 기회로 각국 공사와 더불어 푸라시를 초빙, 연찬을 베풀어 양국의 친선을 한층 굳게 하였다. 이후 1893년경에 이르러서는 킹 슬롯인들의 선교 운동은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한성부 · 용산 · 마포 등지에 의원 · 교회 · 학교 등의 각종 기관이 설치되는 등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