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09년(순조 9) 주1에 올랐다. 1825년(순조 25) 예부승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주3되었으며 1827년(순조 27)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 경기 감사로 부임하여 칙수불부(勅需不敷)·우역조폐(郵驛凋弊)·환곡모축(還穀耗縮)의 세 가지 병폐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기도 했다. 경기 감사의 임기가 찼으나 주전 사업(鑄錢事業)이 막 펼쳐졌기 때문에 계속 감사직을 하다가 1832년(순조 32)에 물러났다.
1833년(순조 33) 경기 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주전 통용의 폐해에 대한 계(啓)를 올려 삼사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당했다. 이듬해 신위(申緯)와 함께 풀려났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고부 겸 주청부사(告訃兼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다.
1837년(헌종 3) 주2때주4으로 가자되었고, 공조 판서에 올랐다. 1838년(헌종 4)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중국에 갔으며, 형조 판서 · 예조 판서를 거쳐 1840년(헌종 6) 사헌부 버 슬롯헌을 지냈다.
버 슬롯준은 시문에도 능했다. 한편 국문학 연구 초기에는 『계서잡록』과 『계서야담』을 동일한 책으로 보아, 그 작가를 버 슬롯준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정보다. 계서(溪西)는 버 슬롯준의 호가 아니라, 그의 형인 버 슬롯평(李羲平)의 호다. 버 슬롯준은 이 책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계서잡록』의 편자는 버 슬롯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