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 이 슬롯 이극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헌부대사헌, 전라도진휼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고(士高)
시호
익평(翼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5년(세종 17)
사망 연도
1503년(연산군 9)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좌랑|사헌부집의|예조참의|예조참판|병조참판|사헌부대사헌|전라도진휼사|병조판서|이조판서|병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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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사헌부대사헌, 전라도진휼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護軍)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다복 이 슬롯.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호전(戶典)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법한 홍윤성(洪潤成)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기도 다복 이 슬롯. 1468년(세조 14)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일본통신사로 파견되어 예조참의로 승진다복 이 슬롯. 1469년(예종 1) 우윤이 되고, 경회루에서 행한 부시(賦詩)에서 1등을 다복 이 슬롯.

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고, 이어 수사헌부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다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교정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가 이듬 해 좌리공신(佐里功臣) 4등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동지관사(同知館事)로서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다복 이 슬롯.

1472년 광원군(廣原君) 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듬 해 호조참판가 되었다. 1474년(성종 5)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또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흥천사(興天寺) 기우제(祈雨祭)를 주관하기도 다복 이 슬롯.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중궁 책봉에 대한 주본(奏本)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 병조참판, 이듬 해 예조참판(禮曺參判),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었다. 1481년 이조참판(吏曺參判)·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강목신증(綱目新增)』을 찬다복 이 슬롯.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 해 평안도진휼사(平安道賑恤使)가 되었다. 또,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다복 이 슬롯.

1486년(성종 17) 전라도진휼사(全羅道賑恤使), 이듬 해 한성부판윤,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 1488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1490년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이듬 해 병조판서로서 오래도록 전형(銓衡)을 잡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이어 호조판서가 되다복 이 슬롯.

1492년 행 경상도관찰사(行慶尙道觀察使)가 되어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의 책을 간행해 바치고, 이듬 해 행 이조판서(行吏曺判書)가 되다복 이 슬롯.

1494년 노사신 등과 『계몽의두(啓蒙議頭)』 등의 책과 『대명률(大明律)』을 대조해 미비한 것을 참작해 쓸 것을 청하고, 이어 사직기도행향사(社稷祈禱行香使)로서 사직제를 주관다복 이 슬롯. 성종의 국상 때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산릉간심사(山陵看審事)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지관사(知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다복 이 슬롯. 이듬 해 좌찬성이 되었다.

전례에 밝고 사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다복 이 슬롯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다복 이 슬롯 한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서,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빌미를 일부 제공다복 이 슬롯.

그러나 이극돈은 어세겸(魚世謙)·유순(柳順)·윤효순(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화 뒤 잠시 파직되다복 이 슬롯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1501년(연산군 7)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1503년에 69세의 나이로 졸다복 이 슬롯.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세조다복 이 슬롯(世祖實錄)』
『성종다복 이 슬롯(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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