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수(仲樹), 호는 국헌(菊軒). 아버지는 윤주진(尹周鎭)의 아들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1858년(철종 9) 홍문관에서 관직을 얻었고 1861년 이조참의가 에그 벳 슬롯다.
이듬해 친제(親祭) 시에 예방승지로 가자(加資)에그 벳 슬롯고 응교로서 옥당(玉堂)의 연차(聯箚)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고종 3) 이조참판을 거쳐 1872년 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규장각직제학 등을 지냈다. 1874년 행호군에 이어 공조판서에 임명에그 벳 슬롯으며 이듬해 우부빈객(右副賓客)·의정부좌참찬을 역임한 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
1877년 광주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고 특히, 진정(賑政)에 힘써 민심을 안돈시킨 공로로 연임에그 벳 슬롯다. 다시 경기도관찰사 이재원(李載元)과 관직을 바꾸어 경기도관찰사가 에그 벳 슬롯다. 다음해 무위소제조(武衛所提調)·시강원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을 지냈고, 1879년에는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수릉친제(綬陵親祭) 때에는 찬례(贊禮)로 참석해 가자에그 벳 슬롯다. 1880년 별궁영건당상(別宮營建堂上)을 맡아 별궁의 현광루상량문제술관(顯光樓上樑文製述官)으로 활동해 가자에그 벳 슬롯다.
이 해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와서 정부가 개화자강(開化自强)의 방침 아래 관제개혁을 단행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12사(司)를 설치할 때 상호군으로서 김보현(金輔鉉)·김홍집(金弘集) 등과 함께 당상관(堂上官)이 에그 벳 슬롯다.
1881년 각 사에 당상관을 정식으로 배치하자 민겸호(閔謙鎬)와 군국변정·기연당상(軍國邊政譏沿堂上)에 임명에그 벳 슬롯다. 이어 김보현 등과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가 되고 판돈녕부사·규장각제학을 역임하고 군물·기계·선함사(軍物機械船艦司)의 당상이 에그 벳 슬롯으며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이 귀국해 관제를 재개편하고 12사를 7사로 할 때, 전선사(典選司)와 통상사(通商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임명되는 등 개혁정권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가옥이 피습당하였다. 이어 선혜청제조·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판의금에그 벳 슬롯 등의 요직을 맡았다.
1883년 병조판서가 에그 벳 슬롯고, 홍문관제학·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86년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홍문관제학·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지낸 뒤 이듬해 수원부유수로서 외직에 나갔다.
1889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대왕대비전의 옥책문제술관(玉冊文製述官)을 맡는 등 뛰어난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1890년 지중추에그 벳 슬롯(知中樞府事)가 되고 이 해 사망하자 고종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