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풍(殷豊). 자는 득지(得止).
1384년 진사에 이어 1386년에 생원이 다복 이 슬롯고,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다복 이 슬롯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사헌시사(司憲侍史)·경력·병조의랑·이조의랑·연안부사 다복 이 슬롯 역임하고, 1405년 상호군으로 동북면에 파견되어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는 등 국경경비를 맡았다.
1417년(태종 17)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를 거쳐 병조참판이 다복 이 슬롯을 때 당(黨)을 만들어 죄없는 신하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박은(朴訔)의 상소로 인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풀려나 공조·예조 참판을 지냈다.
1419년(세종 1)에는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는데, 이때 기근에 처한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대사헌·이조참판·한성부윤·우군도총제 겸 평안도도관찰출척사 다복 이 슬롯 거쳐, 1424년 예조판서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5년 형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예조판서가 다복 이 슬롯다. 풍채가 매우 컸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실수없이 일을 무난히 처리하였다 한다. 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서다복 이 슬롯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