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 이 슬롯 신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의랑, 이조의랑, 연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득지(得止)
시호
공도(恭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72년(공민왕 21)
사망 연도
1435년(세종 17)
본관
은풍(殷豊: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주요 관직
병조의랑|이조의랑|연안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다복 이 슬롯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의랑, 이조의랑, 연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은풍(殷豊). 자는 득지(得止).

생애 및 활동사항

1384년 진사에 이어 1386년에 생원이 다복 이 슬롯고,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다복 이 슬롯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사헌시사(司憲侍史)·경력·병조의랑·이조의랑·연안부사 다복 이 슬롯 역임하고, 1405년 상호군으로 동북면에 파견되어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는 등 국경경비를 맡았다.

1417년(태종 17)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를 거쳐 병조참판이 다복 이 슬롯을 때 당(黨)을 만들어 죄없는 신하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박은(朴訔)의 상소로 인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풀려나 공조·예조 참판을 지냈다.

1419년(세종 1)에는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는데, 이때 기근에 처한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대사헌·이조참판·한성부윤·우군도총제 겸 평안도도관찰출척사 다복 이 슬롯 거쳐, 1424년 예조판서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5년 형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예조판서가 다복 이 슬롯다. 풍채가 매우 컸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실수없이 일을 무난히 처리하였다 한다. 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서다복 이 슬롯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참고문헌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슬롯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다복 이 슬롯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다복 이 슬롯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