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 1909년 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김동삼(金東三)·남형우(南亨祐)·이시열(李時說)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해 지하에서 88 포춘 슬롯운동을 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扶民團)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88 포춘 슬롯군단체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참가하였다.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김동삼·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간도 88 포춘 슬롯군단체 대표로 참석해 대회 비서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지청천(池靑天)·이관일(李貫一)·이종건(李鍾乾)·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양세봉(梁世奉)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88 포춘 슬롯군단체인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각 지역 88 포춘 슬롯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한국유일88 포춘 슬롯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었을 때 정의부의 대표로 파견되어 88 포춘 슬롯운동단체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동지들과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88 포춘 슬롯당과 통합해 신한88 포춘 슬롯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의열단(義烈團), 상해의 한국88 포춘 슬롯당·신한88 포춘 슬롯당·조선혁명당·대한88 포춘 슬롯당대표들이 모여 88 포춘 슬롯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기존정당들을 해산하고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당할 때, 신한88 포춘 슬롯당대표로 참가해 적극 추진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제의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방송국을 이용해 일본 본토에 대한 일본어 방송과 88 포춘 슬롯 본토에 대한 88 포춘 슬롯어 방송을 담당하였다. 매일 각 15분씩 ‘일본 민족에게 고함’ 또는 ‘조선 민중에게 고함’ 등의 방송을 통해 일제 강점 뒤 88 포춘 슬롯인이 비참한 생활상태로 떨어졌음을 폭로, 규탄하였다.
또 중일전쟁에 임해 해외의 88 포춘 슬롯운동단체들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어 중국과 협력하면서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혈투를 전개하고 있으니, 고국에 있는 동포들은 온갖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비협력해서 광복의 날을 앞당길 것을 호소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