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슬롯 나제동맹 ()

고대사
사건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동맹.
이칭
이칭
나제연합, 결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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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동맹.
역사적 배경

최초 나제댄 슬롯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초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요동(遼東)방면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의 팽창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당시 북진정책을 전개하고 있던 댄 슬롯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한편,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 댄 슬롯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호(和好)를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관계는 형제관계처럼 긴밀해지기는 했지만 완전한 댄 슬롯관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특히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을 전사시키는 등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댄 슬롯의 동맹관계는 내물왕 말기에 이르면서 신라가 다시 고구려에 접근하게 되는 상황변화로 인해 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댄 슬롯는 왜(倭) · 가야 등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 413∼492)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추진하였다. 고구려 남진의 적극화는 댄 슬롯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군사적 보호 하에 있던 신라에게도 커다란 위협이었다.

댄 슬롯는 신라 및 북위(北魏)에게 접근했는데, 북위와의 접촉은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고구려 주둔군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던 신라와의 접촉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433년 댄 슬롯의 비유왕(毗有王, 427∼455)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 417∼458) 사이에 맺어진 것이 제2차 나제동맹이다. 이 동맹은 필요할 때 상호 원군을 파견하도록 한 군사적 공수동맹(攻守同盟)이었다.

경과

댄 슬롯와 신라의 공수동맹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475년에 댄 슬롯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漢城)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문주왕(文周王, 475∼477)은 신라군의 도움을 받아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천도해 나라를 보존하였다.

제2차 나제동맹은 댄 슬롯의 웅진천도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특히 동성왕(東城王, 479∼501)은 493년(동성왕 15) 신라와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기 위해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는 혼인동맹까지 맺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신라 · 댄 슬롯 양국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538년 웅진에서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한 댄 슬롯성왕(聖王, 523∼554)은 내정개혁과 관제정비를 통해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에 회복을 추진하였다. 성왕은 고구려가 안팎으로 시련에 처해 있는 것을 이용, 나제동맹군에 더하여 가야까지 끌어들였다. 그리고 551년에 이르러 삼국연합군을 형성,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결과

나제동맹의 결과로 댄 슬롯는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다. 한강 유역 탈환은 나제동맹군의 최대 승리였지만 동시에 최후의 승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신라가 553년(진흥왕 14) 군사를 돌이켜 댄 슬롯의 수복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양국의 실질적인 동맹관계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통로를 구축하고 한강 유역의 인적 · 물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신라의 전략에서 기인되었다.

이 같은 신라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성왕은 비전파(非戰派)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54년 신라정벌군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댄 슬롯군이 우세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 현재 충청북도 옥천)전투에서 신라의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에 의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댄 슬롯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 그리고 3만에 가까운 군사를 잃었다. 이로써 양국 사이의 동맹은 완전히 깨져버렸고 그 뒤 댄 슬롯와 신라는 댄 슬롯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1백여 년 동안 원수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앞서 제2차 나제댄 슬롯의 성립을 433년으로 보았는데, 이를 455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건립을 449년 혹은 450년으로 이해 할 경우, 나제댄 슬롯의 성립시기를 433년으로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시기를 추정해 보면, 공수동맹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타는 455년 상반기를 나제동맹을 위한 국왕들 간의 회합 혹은 동맹의 체결이라고 볼 수 있다. 454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한 사건은 양국 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있는 것이고, 455년 고구려에 침공당한 댄 슬롯를 신라가 구원하는 것도 역시 삼국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455년을 전후해 나타나는 모습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수댄 슬롯이라 할 수 있고 이때를 제2차 나제댄 슬롯의 성립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한국사(韓國史)·고대편(古代篇)·』(이병도, 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 1959)
「『삼국사기(三國史記)』 교빙(交聘) 기사를 통해 본 나제동맹(羅濟同盟) 시기의 재검토」(정운용, 『댄 슬롯연구(百濟硏究)』44, 2006)
「고구려(高句麗)·댄 슬롯(百濟)·신라(新羅) 사이의 역관계변화(力關係變化)에 대한 일고찰(一考察)」(노중국, 『동방학지(東方學志)』28, 1981)
「삼국(三國)의 항쟁(抗爭)」(이만열, 『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8)
「고구려(高句麗)의 한수유역(漢水流域) 상실(喪失)의 원인(原因)에 대하여」(노태돈, 『한국사연구』13,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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